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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창작

자아

by 코디브라이트 2019. 3. 9.

'예술과 사회' 수업, 돈 조반니 감상문


“엘리아스(Norbert Elias)는 궁정과 귀족에 대한 모차르트의 ‘분노’를 당시 철학적 운동을 주도한 시민계급 선구자들의 이데올로기와 같은 맥락의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1)

“저는 별다른 꿈 대신 분노가 있었습니다. 납득할 수 없는 현실, 저를 불행하게 하는 상황과 싸우고, 화를 내고, 분노하며 여기까지 왔습니다.”2)

두 가지 분노에 대한 글을 적어보았다. 그리고 내 분노도 적어보려고 한다. ‘소수를 위한 개발자’ 현재 내 자아이다. 대학 1학년 때 들었던 강연에서 “다수를 위한 노력은 만연하다.”라는 말이 키운 꿈이었다. (다수는 사회 전반적으로 큰일을 의미하기도 한다) 아끼는 사람에게 당당하게 말했었고,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겨왔었다. 그런 내 자아에 최근 분노를 느꼈다.

‘과연 아름다운 자아가 맞을까?’. 작곡가 방시혁의 축사를 듣고 떠올린 말이다. 그가 말한 대로 사실 납득할 수 없는 병든 사회에 분노하고 있지만, 아름다운 꿈으로 포장해 중요한 것을 모르고 있었던 건 아닌가 생각했다. 매번 가슴이 뜨거워지는 순간을 말하라고 한다면, 소수의 삶을 들을 때였다.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다가 발달장애를 가진 자식이 태어나 평생을 법 개정에 힘쓴 어머니의 이야기. 소수에 속하는 것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 없어서, 그들을 위한 노력은 더욱 적어서 매번 내 가슴은 뜨거웠었다. 그렇게 작은 자아가 더 커져 왔었다. 하지만 분노는 잊은 채 그저 아름다운 자아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에서 조금 본질을 잊었다고 느꼈다. 이에 분노했다.

영화 속에서 모차르트와 로렌조 또한 이같이 분노를 했을 것이다. 자신을 내비치면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회. 그런 사회로부터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추방당한 두 사람. 그들은 궁정과 귀족 사회에 분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분노가 하찮은 곡만 연주했던 모차르트를 그리고 추방당하고 모욕당하는 로렌조를 더 열정적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돈 조반니’는 그 분노와 열정의 결과물로써 나에게 다가왔다. 물론 호색가로 표현되는 주인공이 이루는 진정한 사랑 이야기에 대해서는 의문이지만, ‘피가로의 결혼’을 포함한 ‘다 폰테 3부작’ 전체로 그들의 분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끝내 음악을 완성한 모차르트 그리고 인생의 사랑을 이룬 로렌조는 분노를 표출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들의 결말로 미뤄봤을 때, 나는 좀 더 분노해야 할 것이다. 사회는 아름답지 않다. 더 아름답게 만들기로 마음먹었다면 해야 한다. 불구덩이 속에서 분노에 찬 나를 끄집어 냄으로써 사실 귀족들이 불구덩이 속에 갇혀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참된 모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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