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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창작

예술

by 코디브라이트 2019. 3. 9.

'예술과 사회' 수업, 가면 속의 아리아 감상문


예술을 복잡한 표현이라 생각해왔다. 그 심오한 표현을 위하여, 어딘가 몰두한 채 헤어나오지 못하다 결국 빠져나왔을 때, 내 모든 것이 표현된 작품이 생긴다고 믿었다. , 그림, 조각 그리고 음악까지 내 눈에는 예술이었다. 항상 그 안에 담긴 누군가를 보려 했다. 대개 많은 노력과 경험 그리고 감정에 공감했다.

못 배운 것 같다. 그래서 안타깝다.”
"
전공 관련 수업이라면 족히 열 과목도 할 텐데, 교양 과목으로는 최대 2개뿐이다."

첫 수업 시간에 들었던 말이다. 웃는 얼굴로부터 들려왔지만, 나는 웃지 않았다. 문득 예술이 누군가를 안타깝게 보도록 만든다면 애초에 발조차 들이기 싫다는 거부감이 들었다. 동시에, 인정할 건 인정하고 나는 제대로 표현을 하지 못하며, 표현을 보지도 못하는 놈이다. 교수님이 말씀하신대로 장조와 단조 음악을 구분하지 못한다. 슬픔이 밀려왔다. 슬픔은 후에 교수님이 언급한 ‘문화 인력의 육성과 보호에 대한 반감을 불러 일으켰다.

나는 표현을 하지도 보지도 못하는데, 누가 누구를 돕는다는 건지. 하지만 문화를 제외한 인력의 육성과 보호를 검색하면 금세 또 치우쳐진 현실을 느낄 수 있었다. 딱 이 정도의 복잡함을 가지고 가면 속의 아리아영화를 시청했다.

예술인은 왜 보호받지 못할까? 아마 묻는 사람의 직업, 개성, 기분 그리고 상황에 따라 답이 다를 것이다. “기본적으로 문화예술인은 사회적 공공성 제고에 기여하는 사회적 존재이므로…” 라는 논리로 글을 시작하지만, 질문에 대한 답은 찾을 수 없다. 그저 하나의 방향인 예술인을 보호해야 한다’라는 논리로 받아들여 진다. 혹시 질문에 대한 답이 담겨 있을까 영화를 집중해 봤지만, 답이 떠오르진 않았다.

원점으로 돌아가, 사회적 약속과 같이 모두에게 조금이라도 공통될 만한 예술의 정의가 있는지에 대한 것이다. 내가 감상문을 생각의 흐름대로 적을 수밖에 없었듯이 예술도 흘러가고 있는 게 아닌지. 영화를 그저 성악곡으로만 인식한 채, 영화를 빛낸 아리아의 제목 그리고 그 속 가사조차 모르고 영화를 보는 나처럼 대부분이 예술을 흘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렇다면 예술인의 보호를 생각해보기 전에 다시 예술을 먼저 생각해보는 것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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